동, 서양을 막론하고 세상의 질서를 거부하고 틀을 깬 인물과 사상은 언제나 미움을 받았다. 하지만 그 틀과 질서를 부쉈기 때문에 그들은 큰 업적을 남길 수 있었고 현재의 사람들은 그들에 대하여 탐구한다. 이런 이유로 이 글에서는 서양 역사 속에서 아웃사이더로 낙인찍혔지만, 후대에는 하나의 역사로 기록되고 있는 인물과 사상에 대해서 알아볼 것이다.
저항 정신의 상징 스파르타쿠스
영화로도 제작되어 잘 알려진 스파르타쿠스는 기원전 73년 로마에서 7만명의 노예와 함께 봉기를 일으킨 인물이다. 그는 여러 가지 악조건과 세상의 핍박 속에서도 평등한 분배를 외치며, 자신의 사상과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여러 가지 게릴라 전술을 사용하여 로마군을 혼란스럽게 하였으며, 야간기습을 능숙히 진행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분전에도 불구하고 내부분열과 로마 원로원의 방해로 노예혁명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는 이탈리아 반도의 끝부분, 장화 모양의 끝자락인 레기온 지역에서 마지막 전투를 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패배하여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여기서 6만여 명의 노예가 죽었으며, 6천여 명 이상의 노예가 십자가형에 처해졌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왜 성공도 하지 못한 이 아웃사이더 스파르타쿠스가 저항정신의 상징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대표적 이유는 그가 약자의 편에서 지배층에 항거하는 역사 혹은 반열의 시작점에 선 인물이기 때문이다. 즉 실패로 돌아간 혁명이긴 하였지만 그는 역사상 최초로 자유와 평등을 외치며 자신만의 저항의 역사를 써내려 간 인물인 것이다. 이러한 저항의 역사는 이 후 20C 독일의 급진 좌파인 사회당까지 영향을 미쳤고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을 모방한 '스파르타쿠스 단'이라는 단체도 등장하였다.
미켈란젤로와 시스티나 예배당의 관계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더불어 르네상스 시대의 최고의 예술가이자 조각가로 손꼽힌다. 그러나 그는 굉장히 괴팍한 성품을 지녔으며, 사람들과의 관계도 원할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사교성은 부족하였지만 예술성은 굉장히 뛰어났던 미켈란젤로는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부탁으로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 벽화를 그리게 된다.
이 떄, 미켈란젤로는 천지창조를 비롯한 구약성서의 이야기들로 천장을 채우기로 마음먹고 작업에 착수하여 이를 완공한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서양역사의 단편이지만,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에는 매우 수많은 비밀이 숨어있다. 그 비밀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교황 율리우스를 향하여 어린 두 천사가 '손가락 욕'을 하는 모습이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천장 벽화에 자신의 모습이 담기길 원하였고, 미켈란젤로는 이를 반대했지만 결국 교황의 모습을 그렸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어린 두 천사를 함께 넣어 반교황적 메시지를 넣은 것이다. 이는 단순히 교황 개인에게만 전하는 메시지가 아닌 교회의 족벌주의 즉 '네포티즘'에 반하고자 한 것이다. 당시 교회는 권력을 남용하였고,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또한 위선적이며 탐욕에 눈이 멀어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미켈란젤로는 반교황, 반교회적 메세지를 천장 벽화 속에 포함시켰으며, 작업을 마친 뒤에도 " 이 곳에서 그들은 예수의 피를 판다. 미덕으로 가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지인에게 보냈다고 한다. 서양역사에서 예수와 기독교가 차지하는 사상의 비중을 생각한다면 힘들고 믿기 힘든 결정이었지만 불의에 항거한 아웃사이더 미켈란젤로는 이를 행동으로 옮겼고 현대까지도 그 의식과 사상이 남아 기억되는 것이다.
원주민의 아버지, 해방 신학자 라스 카사스
라스 카사스는 최초의 원주민 해방 신학자이다. 그의 집안은 스페인 세비야에서 매우 부유한 상업을 하는 집안이었다. 하지만 그는 도미닉 교단 선교사의 설교를 들은 뒤 불혹의 나이에 모든 재산을 내려놓고 원주민 인디오의 해방을 위하여 싸우게 된다. 그가 들었던 선교사의 설교 내용은 죄 없는 원주민을 노예화하고, 가증스러운 전쟁으로 원주민을 억압, 혹사한다면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는 내용의 설교였다. 이후 라스카사스는 1542년 멕시코 치아파 교구의 주교가 되었으며 자신의 사상을 펼쳐나가기 시작한다. 그는 원주민을 가혹히 대하지 않아야 하며, 일을 시켰을 때 정당한 보수를 주어야 한다고 했으며, 원주민의 토지를 빼앗지 않은 사람만이 고해성사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해방 신학자 라스 카사스의 길은 멀고도 험난하였다. 그 당시 제도권 신학박사인 주앙 세플베다는 라스 카사사의 주장을 전면으로 부정하였고 비유적인 표현을 사용하며 라스카사스를 비난하였다. 주앙 세플베다는 신에게는 두 딸이 있는데 한 명은 매우 아름다운 딸이고 한 명은 못난 딸이며, 그중 못난 딸이 결혼을 하기 위하여 가져가야 하는 지참금이 황금이라고 하였다. 이는 황금주의와 인종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라스 카사스 역시 이러한 주장에 정면으로 반박하였고 끝까지, 원주민의 해방을 위하여 저항하다 인생을 마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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